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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사 역사

화방사 역사
천년고찰 호국성지 화방사(花芳寺)는 남해의 진산이자 제1봉인 망운산 중턱 강진만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보광사(현 보리암)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 역사의 시작이다. 고려시대인 1200년대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스님께서 연죽사를 현 위치 가까이로 옮기고 영장사(靈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렇다.

“진각국사는 멀리 신령스러운 기운이 바다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떼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산을 바라보니 호산(湖山)의 좋은 형상인 망운산이 나타났다. 이곳에 영구(靈區)가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뒤 절 이름을 신령스러운 영기(靈氣)가 감추어져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영장사(靈藏寺)라 하고 스님들을 거처하도록 했다.”

영장사(靈藏寺)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인조 14년(1636),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戒元) · 영철(靈哲) 두 선사가 지금의 위치에 이건 중수(移建重修)하고 연꽃 형상인(연화형국蓮花形局) 지형의 뜻을 취해 화방사(花芳寺)라고 했다. 1740(영조 경신년)에 큰 화재로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다음해인 영조17년(1741)에 석순(碩淳) · 충찰(忠察) · 충념(忠念)스님 등이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어서 영조와 정조 때의 고승인 가직(嘉直) 선사가 머물면서 갖가지 이적(異蹟) 남겼고, 절을 더욱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적특징과 당우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특히 조선조에 많이 유행하였던 부불전(副佛殿)인 명부전과 응진전을 배치한, 이른바 3불 전형(三佛殿型)배치를 보이고 있다. 불전의 수에 따라 보통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 모두 예배용(禮拜用)전각으로 구성된 것을 3불전형이라 한다. 화방사의 3불전형은 특이한 사례로 양산의 장안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방사의 삼불전형은 초기 사찰의 가람 구성 형식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기의 사찰은 탑원, 금당원, 승원 세 영역이 뚜렷이 구분된다. 고려때까지도 금당원 안에는 순수한 예배용 전각들만 배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탑원과 금당원이 통합돼 당탑제(堂搭制)가 성립하며, 이 금당원 영역이 후대의 중심불단 영역(中心佛壇領域)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화방사는 초기 금당원의 순수성을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별도의 승방(僧房)구역, 즉 승원(僧院)을 구성하게 된다.

응진전 위쪽으로는 웅장한 약사대불이 있고, 조금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별도의 고즈넉한 마당과 삼성각이 나온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채진루 중심으로 좌우로 9층석탑과 종각이 있다. 경남 문화재 자료 152호인 채진루는 대웅전 앞마당으로 출입토록 대웅전과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서 출입이 쉽도록 누각바닥이 마당과 같은 높이로 만든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오량(五樑)구조로된 2층 맞배지붕집이다. 세부장식이 조선말기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의 본래 명칭은 보광전이었으나 보광전이 1981년 10월 1일에 화재로 소실되자 1984년 12월 29일에 신축 복원하고 대웅전이라고 하였다.

화방사의 또다른 특징은 대웅전 앞마당에 최근에 세운(1998년) 탑과 안심당(주지채)에서 남해 한려수도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섬에 위치한 사찰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화방사와 옥종자
화방사에는 옥종자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옥종자(玉鐘子)’ 또는 ‘유종자(油鐘子)’가 본래의 이름이다. 이 옥종자는 사찰이 건립되어 불상을 봉안함과 동시에 기름을 넣어 심지에다 점화하여 경내를 밝히는 이른바 옥으로 만든 사발 현등(懸燈)이다. 어느 사찰에서든지 한번 점화하였다가 그 이유 여하 간에 그 불이 꺼지게 되면 두 번 다시 점화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 하나의 특질로 알려져 있다.

현재 화방사에 보관 중인 옥종자에 대하여는 남겨진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로 지금부터 730여년 전인 서기 1234년 이전에 화방사가 고승 진각국사 혜심스님에 의해서 영장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될 무렵 불상봉안과 함께 만들어져 점화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화방사옥종자는 연면(連綿) 360여 년간에 걸쳐 한 번도 꺼짐 없이 성화(聖火)로서 불타 내려 오다가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영장사가 소진되어 버리면서 그 불이 꺼졌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점화할 수 없어 현물만 전하여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직경 24㎝, 높이 12㎝, 깊이 11㎝, 두께 2㎝, 무게 3.9㎏, 용량 3ℓ. (이 청기, 『남해도』, 1976)

현재는 화방사 옥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1981년 대웅전 화재 때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반드시 복원해야 할 화방사 문화 유산 중에 하나다.
호국사찰 화방사와 이순신
화방사는 호국사찰로써 남해 역사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께서 남해 노량에서 순국하신 이후 이충무공의 제당으로 세워진 노량 충렬사를 오랫동안 화방사 스님들이 수호하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완문절목' 13편, '선생안' 7편, '현판기문' 6편을 비롯한 고문서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충무공 충렬 묘비 "목판 비문이 있었다. 그러나 대웅전 뒤편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1년 대웅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것은 당시에 탁본해 두었던 것을 1997년 새로 두질을 복원하여 한질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 보관하고, 한질은 화방사 채진루에 보관하고 있다. 이 목판비는 높이 3m, 폭 1.6m로 나무판 앞뒤에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1300여자가 새겨져 있고 남해 충렬사에 입석되어 있는 비와 똑같은 크기와 내용이다.
호국도량 화방사와 팔만대장경
불교 경전은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심의 결과물이다. 아픈 중생이 없었다면 경전은 애당초 탄생하지 않았다. 이것을 집대성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그 양이 아주 방대하다. 고려 때 목판으로 이 방대한 대장경을 두 번 조성했다. 첫 번째는 불력(佛力)으로 거란의 침범을 물리치기 위해 1011(현종2)년 조성을 시작했다. 이를 초조대장경이라고 한다. 이것이 대구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고종19(1232) 몽골군 2차 칩입 때 모두 불타버린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근 30년 동안 6차례에 걸쳐 잔혹하게 이어진 몽골의 침입은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 가운데 하나였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살상 당했다. 수많은 사찰과 성보들도 잿더미로 변했다. 그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 선조들은 부처님의 크나큰 가피력으로 국난을 이겨내고 새 희망을 찾고자 고려 팔만대장경을 다시 조성하기 시작했다.

전란으로 전국이 아수라장이던 와중에도 전쟁이 종식되고 자주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염원하며 1236(고종23)년부터 1251년(고종38)까지 16년에 걸쳐 수많은 백성들과 물자들이 동원되어 8만여 경판을 판각하였다. 그래서 이 대장경은 체계로서도 오탈자가 거의 없는 완벽하고 방대한 대장경으로서 가치가 높지만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고려국이라고 표기하고 황제만 쓰던 칙勅을 쓰고 원효 의상 등 한국 저술도 포함해서 자주국임을 표방했던 것이다.

이것을 고려재조대장경이라고 하며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국보 32호로 지정되어 있고, 2007년에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것은 현존하는 최고의 대장경판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목판 인쇄문화의 산증인이며 인류문화의 보고다. 화방사가 있는 남해 고현면 일대가 이 엄청난 인류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곳이다. 이때 화방사는 대몽항쟁의 정신적 구심 역할뿐 아니라, 판하본에 필요한 종이 생산을 비롯한 팔만대장경 판각 전반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기념물 산닥나무 자생지
기록에 의하면 화방사는 종이를 생산했던 무지소(貿紙所)가 있었다. 조선시대 부역 중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부역이 종이 만드는 부역이었는데, 주로 사찰이 담당하였다. 화방사는 남해의 대표 사찰로서 종이 생산 등 사찰과 관련된 역사가 조선 후기부터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산닥나무는 일본 및 우리나라 남해, 진도, 강화도에 분포하고 있다. 산과 계곡의 나무 밑에 자라며, 특히 물기가 있는 곳과 비옥한 곳에서 잘 자란다. 나무껍질과 뿌리의 섬유질은 종이의 원료로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나무로 주로 절 주변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는 조선시대에 종이 만드는 일이 대개 절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를 위해 산닥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와 절 주변에 심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 제152호 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 (南海 花芳寺 산닥나무 自生地) 남해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花芳寺) 절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그 수가 대단히 적은 산닥나무들이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는 희귀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된 문화적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